아빠의 TV

엄마는 친구들과 연말여행을 떠났고 둘째 동생은 야간스키 타러 나간 2014년을 하루 남겨둔 저녁, 집에는 나와 아빠 그리고 막내 뿐이였다. 화장실을 가려고 잠깐 일어난 새벽 3시, 어디선가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아 소리를 따라가보니, 아빠의 방에서 일기예보를 전하고 있는 TV소리가 흘러져 나오고 있었다.  새벽의 적막함과 뒤섞인 유일한 TV소리.

고요함과 TV소리가 공존하는 그 곳에 십분간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이 아빠를 TV없이 잠들지 못하게 하였나라는 생각과 함께 몰려온 가슴 깊은곳의 짠함. 냅둘까 하다 조용히 까치발 들고 아빠 방으로 향했다. 티비를 등지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의 크지만 슬픈 등과 그의 머릿맡에 놓여 있는 외로운 리모콘을 보니 괜스래 미안해졌다.

나는 순간 내가 남자이지 못한게 슬펐다. 아무리 내가 책임감이 있고 성숙하다고 한들, 남자만이 겪을 수 있는 가장의 무게를 나는 느끼지 못할걸 알았기 때문 아니였을까. 딸 셋을 키우며 어디서도 말 못할 가장으로써 그리고 남자로써의 삶의 무게를 같이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아니였을까.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누리는 특혜와 행복이 있으며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잘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자라 행복하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 과연 여자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엔 선뜻 답을 못하겠다.

유독 책임감이 강하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한 아빠에게 가끔은 '나에게 기대세요'라 말하고 싶다. 소녀 감성의 엄마와 아직은 마냥 어리다고 생각하는 딸 셋을 이끌고 살아온 지난 25년의 아빠에게 '절 믿으세요' 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슬프다.

내가 우리 아빠를 사랑함과 동시에 존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빠가 가진 여유와 사고의 크기, 관용, 그리고 삶의 자세였다. 사실 최근에 아빠와 같은 듯 다른 한 가장에 대해 알게 될 기회가 있었다. 물론 깊게 알진 못하였지만 그 대화를 통해 내가 아빠에게 가진 존경심이 상대적인 것은 아니였는지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내가 과연 아빠에 대한 존경심이 아빠의 고유한 본질이 아닌 무의식 중에라도 아빠가 축적한 부와 인맥으로부터 발생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 그러나 아빠가 등지고 있던 그 TV를 끄는 그 순간만큼엔 나의 이 모든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빠가 나의 아빠라서 감사하고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아빠라서 고맙다. 자고 있는 나에게 와서 이불을 덮어주며 춥진 않냐고 물어줄 수 있는 아빠라서 사랑하고, 여유있게 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아빠라 감사하다. 그런 아빠이기 때문에 물론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아빠가 어느 순간 빈털털이가 되고 사회적으로 힘없는 인물이 된다 할지라도 난 아빠를 정말 가슴깊이 누구보다 더 사랑할 수 있을거 같다. 아빠는 숨쉬는 그 존재 자체로써 이미 멋있는 인간이고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며 그렇기에 누구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순간이 왔을 때에도 난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때에 내가 할 수 있는게 별거 없을수 밖에 없기에 난 더 아빠의 행복을 기도하고 싶다. 나에게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이러한 상황을 일궈준 우리 아빠가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나는 소망한다. '나에게 기대세요'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순간을.